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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by 구지뽕농부 2021. 5. 24.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법구경-제1장 쌍서품(雙敍品) 1,2게송

1.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心爲法本 心尊心使  심위법본 심존심사
中心念惡 卽言卽行  중심렴악 즉언즉행 
罪苦自追 車轢于轍  죄고자추 차력우철

2.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형상을 따르듯이

心爲法本 心尊心使  심위법본 심존심사
中心念善 卽言卽行  중심렴선 즉언즉행 
福樂自追 如影隨刑  복락자추 여영수형 

[해설]

경전에 보면 ‘마음’이란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전에서 나오는 마음이란 용어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진심이란 본래심, 자성청정심, 정심이라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본래마음, 즉 불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망심이란 번뇌심, 생멸심, 산심(散心)이라 이해되며
우리들의 산란하고 번뇌에 휩싸인 분별심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음이란
진심이 아닌 망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망심, 즉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며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망심이란 유위법(有爲法)의 근본이 되는 마음으로
유위란 위작(爲作) 혹은 조작(造作) 즉, ‘만들어진 법’이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세계의 법칙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유위법 즉 망심이 근본이 되어
현상세계의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심이란 무위법(無爲法)으로
만들어지거나 생멸하는 법칙이 아닌
만들어지기 이전 세계의 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심이란 무엇 하나 붙을 것이 없고 만들어 질 것이 없는
일체가 딱 끊어진 공(空)의 본래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말한 ‘마음’이란
망심 즉 우리의 분별심, 생멸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별 망심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세상을 만든다는 말이지요.
세상을 만드는 근본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일으켜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불교 수행의 근본은
이렇게 일체 만들어진 세상의 근본이며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망심, 생멸심이란 놈을 비우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세상을 만들었기에 괴로움이 생겨났으므로
괴로움을 여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었던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마음 없음’을 깨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있기에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있기에 세상을 만들어 내며,
마음이 있기에 괴로움이 나오게 됩니다.

수행자는 마음 그 이전의 자리, 본래자리를 찾아 가는 만행자입니다.
그래서 ‘마음 없음’의 자리 즉 무심(無心)을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심(心)이 세상을 만들어 내었지만
무심이란 더 이상 만들 것도 이룰 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마음(心)에서 무심(無心)을 찾아가는 것이
모든 수행자가 정진하고자 하는 궁극의 수행인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삿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고 하였으며,
순수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악업(三惡業)을 짓게 될 경우
허물과 괴로움이 따르며,
신구의로 세 가지 선업을 짓게 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첫번째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부처님 근본교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 세계란 연기법, 인과법의 세계입니다.
본래는 텅 비어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본래마음, 무심에
우리들이 스스로 마음을 만들어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을 만들었고,
그 분별은 우리의 삶을 행복과 괴로움이란 극단의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이러한 결과는 엄격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엄한 과보를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마치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는 것처럼,
그리고 그림자가 그 형상을 따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현실에 대해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과가 명확할진대 그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탓하려 한다면 우리의 어리석은 분별 망심으로 저지른
저 스스로의 삿된 마음을 탓할 일입니다.

삿된 마음(惡)과 순수한 마음(善)을
중생의 입장에서 이상과 같이 선악으로 해석해 보았지만,
법구경에서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본래 의미는
이러한 선악 인과를 넘어 그 깊이를 더합니다.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또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의 설명에서는 삿된 마음을 악(惡)으로
순수한 마음을 선(善)으로 해석하였지만,
법구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참된 의미는
삿된 마음이 망심(妄心) 즉 ‘마음(心)’을 의미하며,
순수한 마음이 진심(眞心) 즉 ‘무심(無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삿된 마음이란 단순히 악심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분별심, 생멸심, 망심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을 모두 포함하는 분별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마음’ 즉 망심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이란 ‘마음 없음’, 즉 무심(無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이 참된 순수한 마음입니다.
일단 분별이 생기고 나면 선이든 악이든 과보를 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선은 순수하고 악은 삿되다는 말은 좁은 인과의 소견입니다.
수행자가 바라보는 순수한 마음이란 ‘마음없음’임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무심은 아무것도 붙을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공(空)이며 무아(無我)입니다.
이것만이 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래자리, 그 바탕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삿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따른다는 말은
일단 분별지어 마음을 일으키면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이 되어
세상을 만들어 내게 되며,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란
이미 생멸이란 분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나아가 선악, 행과 불행 등을 비롯한 온갖 분별을 만들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마음을 일으키면 허물과 괴로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일단 만들어진 것은 멸해야 한다는 사고(死苦)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순수한 마음, 무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우리를 따른다는 말은
텅 비어 순수하고 꽉 찬 그 마음자리는 그대로 지고의 행복이란 말입니다.

앞서 해석해 보았던 순수한 마음 즉 선한 마음이 선과를 가져온다면
여기에서 말한 순수한 마음이란 선도 악도 딱 끊어진
온전한 행복, 지고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비해 행복한 상대행복이 아닌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과 즐거움이란
선을 행하여 얻을 수 있는 선의 과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이란 선악이란 말 조차 붙을 수 없는 절대행복이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이 일어나기 그 이전의 자리를 깨쳐야 합니다.
무심을 깨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있음이란
이미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선악의 분별 속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수행자는 순수한 마음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서 순수한 마음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생활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순수한 마음을 실천한다는 말은
무심이 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리에서 온전히 무심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마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내가 있고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가지고 무심을 닦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마음을 놓고’ 사는 길입니다.
방하착의 삶입니다.

마음을 내되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면 자취가 끊어지기 때문에
행은 있어도 업이 붙지 않습니다.
순간 순간 마음을 내면서 놓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활 수행자의 ‘순수한 마음’ 즉 무심의 실천인 것입니다.